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이하 AI 교과서)의 법적 지위를 ‘교과서’에서 ‘교육자료’로 격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4일 국회를 통과한 가운데 AI 교과서 발행사들이 법 개정 철회와 헌법소원 등 강경 대응에 나섰다.
6일 AI 교과서 발행·개발협력사와 한국교과서협회는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번 법 개정을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한 정치적 결정”이라며 “검증 없는 졸속 입법을 폐기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천재교과서, 비상교육, 동아출판, 아이스크림미디어, 씨마스, 엔이능률, 교문사 등 AI 교과서 주요 발행사와 한국교과서협회가 공동 주최했다. 참석자로는 박정과 천재교과서 대표, 허보욱 비상콘텐츠컴퍼니 대표, 이욱상 동아출판 대표, 현준우 아이스크림미디어 대표, 이미래 씨마스 대표, 주민홍 엔이능률 대표, 류원식 교문사 대표, 류상희 한국교과서협회 상무이사가 참석했다. 성명서는 현준우 아이스크림미디어 대표가 낭독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AI 교과서는 수천억 원이 투입된 공교육 혁신의 플랫폼”이라며 “그 법적 지위를 정치적 논의만으로 교육자료로 격하하는 것은 교육 현장의 현실과 국가 정책의 연속성을 모두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번 초·중등교육법 개정은 법적 근거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채 추진됐다”며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 “AI가 없다?… 법 개정 근거 사실과 달라”
이날 발행사들은 국회가 법 개정의 핵심 근거로 제시한 △AI 교과서에 AI가 없다 △개인정보 침해 가능성 △AI 교과서 도입과정 사전 연구 근거 부재 △AI 교과서 교사 연수 부재 △교육 격차 심화 △ 설문조사 결과 80% 반대 △이용자 수 10% 미만 등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각 이유에 대해 반박했다.
현준우 아이스크림미디어 대표는 “AI 기능이 없다는 주장은 챗GPT가 없다는 식의 단편적 해석”이라며 “AI 기반 진단 평가, 학습 결과 분석 등 AI 교과서는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소버린 AI 정책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시스템을 국회가 부정하고 교육부가 정치적 풍향에 따라 입장을 바꾼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AI 교과서는 오픈AI의 챗GPT나 구글의 제미나이 같은 생성형 AI를 활용할 수 없도록 개발 가이드라인에 명시돼 있다. 학생 개인정보의 해외 유출 우려와 생성형 AI의 할루시네이션 같은 오류 가능성 때문이다. 검정 과정에서도 정확성과 신뢰성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었다.
문제는 또 있다. 현재 AI 교과서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을 통해 연동되는 공공 시스템과 함께 작동되도록 설계돼 있다. 당장 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으면 AI 교과서는 사용할 수 없게 돼 있다. 이들은 교육부는 교육자료가 된다고 해도 시스템의 지속 운영을 명확히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AI 교과서는 정부 국책과제로 제안돼 민간이 수년간 자비로 개발한 결과물인데 교육자료 격하 법안이 진행되는 최근 과정에서 교육부는 단 한 번도 발행사와 협의하지 않았다”며 “검정료를 지불하고 내년 AI 교과서 심사까지 진행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법적 지위를 박탈한 것은 명백한 행정의 실패”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발행사들은 교육부의 대처에 대해 실망감도 드러냈다. 2차 년도 AI교과서 개발 과정에서 교육부는 분명히 ‘교과서’로서의 지위를 전제로 각종 심사와 검정 절차를 진행해왔다. 실제로 발행사들은 AI 디지털교과서에 대한 검정료를 납부하고 시범학교 운영과 교사 연수 등 다양한 준비 작업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최근 교육부는 관련 심사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내년 AI 교과서 검정에는 12개 발행사의 74종의 AI 교과서가 심사를 받고 있었다. 발행사들은 이미 1종당 4000만 원의 심사비를 내고 수백억 원 규모의 개발을 완료한 상태다.
이들은 “아직 대통령의 서명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부가 선제적으로 심사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것은 행정부가 국회의 결정만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라며 “교육부와 같은 배를 타고 AI 교과서를 만들어 왔는데 교육부가 먼저 배에서 뛰어내린 격”이라고 토로했다. 이어 “교육부는 정책 일관성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1년간 검증 후 재논의하라”… 업계 요구사항 제시
이날 발행사들은 정부를 향해 △법 개정안 폐기 또는 최소 1년간의 현장 검증 기간 확보 △정책 변경에 따른 민간 투자 손실에 대한 합리적 조치 △ AI 교과서의 공교육 내 지속적인 활용을 위한 정책 △KERIS 포털 로그인과 연동된 AI 교과서 통합 시스템의 지속적 운영 보장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들은 “단 1년이라도 실제 현장에서 활용한 후 교육자료 여부를 재논의해야 한다”며 “어떤 검증 과정 없이 법이 통과된 것은 민간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은 “AI 교과서를 실제로 사용한 교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0% 이상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며 “AI 교과서는 교육격차 해소와 사교육비 절감뿐만 아니라 다문화 가정과 장애학생을 위한 맞춤형 학습 지원 기능까지 탑재돼 있어 공교육 전반에 실질적인 기여가 가능한 혁신적 도구”라고 강조했다.
헌법소원 추진과 관련해 발행사들은 “이번 법 개정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지에 대해 헌법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며 “이미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 만큼 빠르면 이달 중 헌법소원이 제기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AI 교과서는 지난 정부가 ‘세계 최초 AI 교과서’ 도입을 내세우며 추진한 대표적인 교육 정책이었다. 이에 반해 AI 교과서의 법적 지위를 ‘교육자료’로 격하하는 방안은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이번 법안은 AI 교과서가 실제 학교에 도입되기 전인 지난해 12월에도 한 차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무산될 위기에 놓였지만 당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교과서 지위를 유지해왔다. 이후 AI 교과서는 올해 전체 도입이 아닌 학교 자율 선택 방식으로 운영됐다. 지난 1학기에는 전국 약 32%의 학교에서 실제 수업에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