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아침에 신은 운동화, 출근길에 탄 자동차, 집에 새로 들인 소파. 이 모든 제품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버추얼 트윈(Virtual Twin)’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버추얼 트윈은 실제 제품을 가상 환경에 그대로 구현한 기술입니다. 전 세계 주요 제조사들이 활용하고 있지만, B2B 기술의 특성상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합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THE AI는 ‘버추얼 트윈 라이프’ 시리즈를 통해 보이지 않던 이 기술을 조명합니다. 신발부터 심장까지, 분자부터 도시까지. 당신이 몰랐던 버추얼 트윈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출근길 자동차 안. 당신은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건다. 만약 이 차가 시속 60km로 벽에 부딪힌다면 어떻게 될까. 에어백은 0.03초 안에 펼쳐지고, 차체는 정확히 계산된 지점까지만 찌그러진다. 운전자의 무릎이 대시보드에 닿지 않도록, 측면 충격 시 문이 열리지 않도록, 성인 남성과 여성, 뒷좌석 아이의 안전까지 모두 설계됐다.
이 완벽한 안전 설계를 위해 자동차 제조사들은 물리적 충돌 테스트를 진행한다. 문제는 비용이다. 프로토타입 한 대를 만들어 충돌 테스트를 진행하면 1회당 약 2억원이 든다. 최근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더 높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자동차 한 대를 만들 때 필요한 충돌 테스트 횟수는 100번이 아니다. 1000번이 넘는다.
김현진 다쏘시스템코리아 3D익스피리언스센터장은 “2억원이 한 번에 날아가는 것”이라며 “기업들은 이런 물리적 프로토타입 제작을 최소화하고, 대부분을 가상 환경에서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 2억원 짜리 충돌, 1000번 반복하는 법
자동차 충돌 테스트가 이토록 많이 필요한 이유는 시나리오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이 운전할 때, 성인 여성이 운전할 때, 뒷좌석에 아이가 탑승했을 때 충격이 어떻게 전달되는지가 모두 다르다. 정면 충돌뿐 아니라 측면 충돌, 각도별 충돌 등 다양한 상황을 테스트해야 한다.
김 센터장은 “차체가 어디까지 손상되고 찌그러지느냐가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어느 범위까지 손상되느냐에 따라 탑승자 부상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버추얼 트윈은 이 문제를 가상 환경에서 해결한다. 물리적 프로토타입 없이도 충돌 순간을 정밀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성인 남성이 탔을 때, 여성이 탔을 때, 뒤에 아기가 있을 때 등 다양한 시나리오로 1000번 이상의 테스트를 가상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이미 변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에서는 가상 환경에서 테스트한 결과를 인정하는 추세다. BMW 등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은 신차 개발 시 가상 테스트를 먼저 진행하고, 물리적 테스트는 정말 필요한 최소한만 진행한다.
ESG 경영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찌그러진 프로토타입은 결국 폐기물이다. 매번 테스트할 때마다 막대한 양의 고철이 발생하는 셈이다. 김 센터장은 “물리적 프로토타입을 만들수록 탄소 배출이 늘어나고 ESG 경영과는 멀어진다”고 지적했다.
◇ 1만명 이상이 함께 만드는 차, 개발 속도 1년 빨라져
버추얼 트윈은 자동차 생산의 속도도 높여준다. 대표 사례가 BMW다. 2024년 2월 BMW와 다쏘시스템은 장기 전략적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핵심은 BMW의 미래 엔지니어링 플랫폼을 다쏘시스템의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 기반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이 플랫폼에는 1만7000명의 BMW 엔지니어가 접속한다.
독일 뮌헨 본사뿐 아니라 미국, 중국, 한국 등 전 세계에 흩어진 설계팀, 해석팀, 생산팀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실시간으로 협업한다. 모델별 다양한 변형 버전을 가상 트윈으로 구현하고, 실시간 통합 데이터를 바탕으로 작업한다.
율리엔 호엔슈타인 BMW 연구개발 부사장은 “디지털로 생각하고, 연결되어 일하고, 통합된 데이터에 의존해야만 엔지니어링 프로세스를 최적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BMW는 이를 통해 부품 재사용성을 높이고, 차량 변형의 복잡성을 관리하며, 엔지니어링부터 제조까지의 사이클 타임을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실시간 협업은 업무 효율성을 높여줬다. 기존에는 작업 시 디자이너가 작업한 파일을 내보내고, 데이터를 변환해서 설계팀에 넘겨주는 과정을 거쳤다. 수정이 발생하면 다시 내보내기를 반복했다. “이게 최종”, “진짜 최종”, “진짜 진짜 최종”이라는 말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김 센터장은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는 디자이너가 스케치하면 설계자가 바로 3D 모델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며 “데이터를 주고받으면서 발생하는 번거로움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르노는 2만명의 직원이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을 사용하도록 클라우드 기반으로 전환했다. 디자인, 제품 엔지니어링, 산업 공정 엔지니어링, 부품 및 자재 구매, 원가 계산, 품질 관리 등 다양한 부서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협업한다. 르노는 이를 통해 차량 개발 시간을 약 1년 단축했다.
생산 현장에서도 버추얼 트윈이 활용된다. 조립 라인의 가상 트윈을 만들어 로봇들의 레이아웃과 용접 포인트 동선을 시뮬레이션한다. 김 센터장은 “로봇들이 서로 부딪히면 하루 공장을 세워야 한다”며 “하루 공장을 세우면 제품 만드는 일정이 딜레이되고, 납기 일정이 늦어지면 고객사로부터 클레임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자동차 제조사는 버추얼 트윈으로 조립 라인을 재설계해 생산성을 30% 높였다. 가상 환경에서 병목 현상을 미리 발견하고 최적의 장비 배치를 찾아낸 결과다.
작업자 안전도 시뮬레이션 대상이다. 에르고노믹 시뮬레이션을 통해 작업자가 반복 작업을 할 때 척추에 무리가 오지 않는지 분석한다. 김 센터장은 “작업자들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알루미늄 언제 살까?”… AI가 설계하고 구매까지 결정
버추얼 트윈 환경에서 AI 활용도 많아지고 있다. 김현진 센터장은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사옥에 위치한 다쏘시스템코리아 3D익스피리언스센터에서 AI 에이전트와 대화하며 차량을 설계하는 과정을 시연했다. “4인승으로 EU에 납품할 거 만들려고 하는데, 디멘션 어떻게 가야 될까”라는 질문에 AI는 차량의 최대 높이 등 규격을 추천했다. “5% 줄여줘”라고 요청하자 이 역시 즉시 조정됐다. 마치 챗GPT와 대화하듯 자동차를 설계하는 모습이었다. 설계자가 국가별 안전 규제를 일일이 찾아볼 필요 없이, AI가 유럽·미국·중국 등 각국의 복잡한 규제를 자동으로 반영해 줬다.
AI는 반복적인 업무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김 센터장은 “자동차 한 대를 만들 때 설계 변경은 1000번 이상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기존 방식에서는 설계가 끝날 때마다 누군가 모델들의 중량을 산출해 엑셀에 일일이 적어야 했다. 1000번의 설계 변경이 있으면 엑셀도 1000번 업데이트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오타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김 센터장은 “작은 숫자 오타 같지만, 이 작은 실수가 생산 차질로 이어진다”며 “불량품이 발생하면 완성차 업체엔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AI는 원자재 구매 시점까지 예측한다. 르노는 다쏘시스템의 AI 기반 원가 인텔리전스 솔루션을 도입해 원자재 가격 변동에 대응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에는 알루미늄이 많이 사용되는데, 국제 정세와 공급망 문제로 가격 변동 폭이 크다. 김 센터장은 “알루미늄에 돈을 너무 많이 쓰면 차량 원가가 높아지고 ROI가 나빠진다”며 “언제 알루미늄을 구매하는 게 가장 좋을지 AI가 예측해준다”고 설명했다. 르노는 이 솔루션으로 장비 설계, 구성, 과거 데이터, 예측 정보를 통합하고, 가상 트윈에서 다양한 설계 시나리오를 테스트한다. 원자재 가격 상승의 영향을 시뮬레이션하고, 차량 가격과 원가를 최적화하며, 이 인사이트를 공유해 구매 협상력을 높인다.
로랑스 몽따나리 다쏘시스템 교통·모빌리티 산업 부사장은 “6개월 만에 르노의 기업 전체 데이터를 연결했다"며 "가상 트윈을 차량에서 공급망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빌 드브리스 다쏘시스템 산업 혁신 및 성공 담당 부사장은 “OEM과 공급업체가 받는 압박은 엄청나다”며 “EV, 자율주행, 저비용 국가의 경쟁 압력 등 모든 요인이 자동차 OEM들이 새로운 기술을 고려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자동차 업계도 이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주요 제품은 다쏘시스템의 렌더링 기술로 제작됐다. 람보르기니 홈페이지의 차량 이미지도 대부분 사진이 아닌 렌더링이다.
다쏘시스템에 따르면, 전 세계 자동차 OEM 상위 10개 기업 전부가 버추얼 트윈 솔루션을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