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아침에 신은 운동화, 출근길에 탄 자동차, 집에 새로 들인 소파. 이 모든 제품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버추얼 트윈(Virtual Twin)’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버추얼 트윈은 실제 제품을 가상 환경에 그대로 구현한 기술입니다. 전 세계 주요 제조사들이 활용하고 있지만, B2B 기술의 특성상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합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THE AI는 ‘버추얼 트윈 라이프’ 시리즈를 통해 보이지 않던 이 기술을 조명합니다. 신발부터 심장까지, 분자부터 도시까지. 당신이 몰랐던 버추얼 트윈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주말 저녁 한강 러닝 코스. 형형색색 러닝화를 신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달린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오늘의 기록을 올리고, 러닝 크루 모임에서 함께 달리며 소통한다. 현재 업계가 추산하는 국내 러닝 인구는 약 1000만 명. 러닝화 시장 규모만 1조 원을 돌파했다. 러닝은 이제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러닝화 선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러닝화 계급도’가 등장했고, 입문자용부터 최상급 레이싱화까지 수십 종류가 넘는다. 발 모양, 보폭, 착지 방식에 따라 적합한 신발이 다르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택은 부상으로 이어진다.
글로벌 신발 브랜드들은 이 문제를 ‘버추얼 트윈’ 기술로 풀고 있다. 개인의 발 데이터를 3D로 스캔하고, 뛰는 동작을 시뮬레이션해 맞춤형 러닝화를 설계한다.
◇ 발 스캔 5분, 3D 데이터로 맞춤 설계
일본 스포츠웨어 브랜드 아식스는 2022년 하라주쿠 플래그십 스토어 5주년 이벤트에서 고객의 발을 3D로 스캔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스캔 데이터는 3D 모델로 변환되어 러닝화용 삭라이너(insole)를 자동으로 디자인하는 데 사용됐다. 고객에게는 ‘가장 잘 맞는’ 옵션과 쿠션 수준이 다른 두 가지, 총 세 가지 옵션이 제공됐다.
아식스는 다쏘시스템의 3D익스피리언스(3DEXPERIENCE) 플랫폼을 활용해 개인화 서비스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평발이거나 발등이 높은 등 사람마다 다른 발 모양을 포인트 클라우드 데이터로 수집하고, 뛰었을 때 충격이 어떻게 오는지 시뮬레이션한다. 복잡한 밑창 구조도 버추얼 트윈으로 설계한다. 뒤꿈치는 폭신하고 발바닥은 딱딱해야 하는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설계가 가능한 이유다.
발 편한 신발로 유명한 유럽 브랜드 에코(ECCO)도 다쏘시스템 솔루션을 활용해 신발을 제작하고 있다. 김현진 다쏘시스템코리아 3D익스피리언스센터장은 “전 세계 신발 회사 상위 10개 중 8개가 다쏘시스템의 버추얼 트윈 솔루션을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 파리에 개설한 ‘맞춤 신발 스튜디오’
다쏘시스템과 아식스는 2024년 8월 개개인의 발 모양에 맞춘 주문 제작 ‘삭라이너’를 제공하는 ‘아식스 퍼스널라이제이션 스튜디오’를 프랑스 파리에 공동 개설했다고 밝혔다. 이 스튜디오는 초소형 생산시설로, 다쏘시스템의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과 버추얼 트윈 기술을 아식스의 스포츠 기술과 결합해 현장에서 맞춤 제작한다.
프로세스는 간단하다.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에서 개인 발 모양 데이터를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한 뒤, 삭라이너 모양을 설계한다. 이를 고급 3D 프린팅 기술로 제작하면, 격자 구조로 우수한 통기성과 푹신함을 지닌 삭라이너가 완성된다. 발 부위에 따라 푹신한 정도를 조절해 긴장감을 줄이고 신체 회복을 돕는 동시에 운동 능력도 향상할 수 있다.
아식스는 2025년 추가 테스트를 위해 퍼스널라이제이션 스튜디오를 일본으로 이전하며, 향후 해당 기술을 삭라이너 외 다른 풋웨어 제품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미츠유키 토미나가 아식스 대표이사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이 파트너십으로 두 선도기업의 첨단 기술과 전문성을 활용해 모든 고객에게 최적의 가치를 제공하고, 개별 요구에 부응하는 제품으로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 물리적 테스트 없이 천 번 시뮬레이션
버추얼 트윈의 핵심은 물리적 프로토타입 없이도 제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 센터장은 스마트폰 제작에 버추얼 트윈이 사용되는 사례를 들며 “휴대폰을 떨어뜨렸을 때 액정이 깨지지 않도록 하는 ‘드롭 테스트’를 천 번 이상 한다”면서 “180cm 사람이 떨어뜨렸을 때, 150cm 사람이 떨어뜨렸을 때 등 다양한 시나리오로 시뮬레이션한다”고 설명했다.
러닝화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체중, 보폭, 착지 방식에 따라 발에 가해지는 충격을 시뮬레이션하고, 최적의 쿠션과 반발력을 찾아낸다. 실제로 신발을 만들어 테스트하는 대신 가상 환경에서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설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아식스 관계자는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에서 제품의 형태와 기능뿐만 아니라 환경적 영향을 모니터링할 수 있어 지속가능성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한국 런닝 열풍과 함께 러닝화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운동화 시장은 약 4조원, 이중 러닝화 시장은 1조원으로 추정된다. 무신사는 2024년 7월부터 9월까지 러닝화 거래액이 전년 동기 대비 53%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파스칼 달로즈 다쏘시스템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9월 한국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디지털화가 기존 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친다면, 가상화는 상상력을 과학으로 구현해 미래를 창조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라며 “우리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라 미래를 발명하는 거대한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센터장은 “가상 환경에서 발의 3D 데이터와 러닝 동작을 시뮬레이션하면, 각자에게 최적화된 신발을 설계할 수 있다”며 “개인 맞춤형 제품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