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신약 개발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임상시험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제약업계의 ‘게임 체인저’로 떠올랐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0년 이상 걸리고 수조원의 비용이 드는 상황에서, AI가 이 과정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글로벌 임상시험 솔루션 업체 메디데이터(Medidata)는 전 세계 임상 연구 전문가 2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응답자의 56%가 이미 조직에 AI를 도입했다고 30일 밝혔다. 37%는 적극적으로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밝혀, 제약업계 전반이 빠르게 AI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는 것이 메디데이터의 설명이다.
메디데이터에 따르면 신약 개발 과정에서 임상시험은 가장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단계다. 미국 바이오 전문 매체 피어스바이오테크에 따르면, 임상시험이 하루만 지연돼도 약 4만달러(약 5700만원)의 비용이 추가로 들고, 50만달러(약 7억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한다.
문제는 임상시험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터프츠대학 의약품 개발연구센터 조사 결과, 3상 임상시험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는 평균 360만건으로 20년 전보다 약 7배 늘었다. 환자들의 건강 데이터를 디지털로 수집하는 방식이 도입되면서 관리해야 할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런 복잡한 데이터를 사람이 일일이 검토하고 정리하려면 수 주에서 수 개월이 걸린다. 데이터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임상시험 프로토콜(계획서)을 잘못 설계하면 중간에 수정해야 하는데, 이 경우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업계는 AI를 도입하고 있다. 메디데이터는 조사에서 AI 사용 기업의 73%는 “AI 도입이 기대에 부합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답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70%는 데이터 정확도가 개선됐다고 했고, 61%는 데이터 수집 과정이 간소화됐다고 응답했다.
AI가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 분야는 △임상시험 보고서 작성(73%) △데이터 이상값 탐지(70%) △병원(시험기관) 선정(69%) △데이터 수집 및 품질 관리(68%) 등으로 나타났다. 모두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업무들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AI 도입으로 신약 개발 기간을 평균 6개월 단축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연구에선 AI가 임상시험 설계 기간을 평균 73일 줄일 수 있다는 결과도 나왔다.
AI로 인해 임상시험의 전 과정이 바뀌고 있다. 먼저 데이터 관리 과정이 자동화됐다. 과거엔 임상시험 데이터를 정리하고 검토하는 데 수 주가 걸렸지만, AI는 실시간으로 데이터의 오류를 찾아내고 자동으로 표준화한다. 메디데이터의 AI 솔루션을 사용한 기업들은 데이터 검토 주기를 최대 80%까지 단축했고, 데이터베이스를 확정하는 시간도 수 주에서 며칠로 줄어들었다. 임상시험 계획서를 짜는 단계에서도 AI가 큰 역할을 한다. AI는 과거 3만6000건 이상의 임상시험 데이터를 분석해 어떤 조건으로 임상시험을 설계해야 성공 확률이 높은지 미리 예측한다. 환자를 몇 명 모집해야 하는지, 어느 병원에서 진행하는 게 좋은지, 환자 선정 기준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등을 AI가 제안한다.
병원 운영도 효율화됐다. AI를 활용해 계약서를 검토하고 비용을 처리하는 시간이 최대 50% 줄었고, 임상시험에 적합한 환자를 찾는 시간도 40% 단축됐다. 한 사례에선 환자 모집이 예상보다 저조하자 AI로 원인을 분석해 더 적합한 병원을 재선정했고, 그 결과 환자 등록 기간을 6개월 이상 앞당겼다.
AI는 임상시험 데이터를 미국 식품의약국(FDA) 같은 규제기관에 제출할 형식으로 자동 변환하기도 한다. 실제 20개 임상시험 데이터를 AI로 변환한 결과, 사람의 개입 없이도 98% 정확도를 기록했다. 이는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면 며칠씩 걸리는 일을 AI가 몇 시간 만에 해낸 것이다.
환자 관리에도 AI가 쓰인다. AI 챗봇이 환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임상시험 참여를 독려하고, 중도 탈락 위험이 있는 환자를 미리 파악해 관리한다. 다국어 지원도 가능해 글로벌 임상시험에서 환자 참여율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김혜지 메디데이터 아시아·태평양 지역 마케팅 총괄(상무)는 “조기에 AI를 도입한 기업들은 절감한 시간과 비용을 후속 연구에 재투자하며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며 “메디데이터 AI의 효과는 이미 수치로 입증되고 있으며, 환자들이 혁신 치료제에 더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메디데이터는 25년간 전 세계 3만6000건 이상의 임상시험을 지원하며 1100만명 이상의 환자 데이터를 축적했다. 이를 토대로 임상시험 설계부터 환자 모집, 데이터 관리, 규제 제출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AI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FDA에서 승인된 신약 중 72%가 메디데이터 기술을 활용했다. 2015년 이후 전체 승인 신약의 62%도 메디데이터의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