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얼 트윈 라이프⑥] 의사도 비관한 수술, 가상 환자가 풀었다
심장기형 딸 위해 시작한 ‘리빙하트 프로젝트’, 2014년 FDA 합류 CT 촬영 데이터로 3D 심장 모델 제작, 수술 전 1000번 시뮬레이션 10년 후 건강 상태 예측, 약물 반응까지 미리 확인
[편집자 주] 아침에 신은 운동화, 출근길에 탄 자동차, 집에 새로 들인 소파. 이 모든 제품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버추얼 트윈(Virtual Twin)’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버추얼 트윈은 실제 제품을 가상 환경에 그대로 구현한 기술입니다. 전 세계 주요 제조사들이 활용하고 있지만, B2B 기술의 특성상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합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THE AI는 ‘버추얼 트윈 라이프’ 시리즈를 통해 보이지 않던 이 기술을 조명합니다. 신발부터 심장까지, 분자부터 도시까지. 당신이 몰랐던 버추얼 트윈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평생 제조 전문가들이 실제 제품을 만들기 전에 작동 방식을 시뮬레이션하도록 돕는 일을 해왔습니다. 의사들을 상대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해 볼 수 없을까요?”
스티븐 레빈 다쏘시스템 버추얼휴먼 모델링 시니어 디렉터가 2012년 던진 질문이었다. 그의 딸 제시 레빈(현 신경과 전공의)은 선천적으로 좌우가 뒤바뀐 심장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의사들은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며 낙관적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연구 과학자로 다쏘시스템에서 일해온 레빈 디렉터는 3D 설계 솔루션 솔리드웍스로 딸의 심장을 그대로 구현했다. 제시의 심장을 본떠 만든 가상 심장 모델을 기반으로 의료진이 상황을 예측하고 치료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의료진은 실제 수술 전 가상 환경에서 제시의 수술을 미리 테스트했다.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절박함에서 시작된 ‘리빙 하트 프로젝트’(Living Heart Project)가 지금 전 세계 의료계를 바꾸고 있다. 전 세계 사망 원인 1위인 심장 질환. 이 난제에 제조업의 버추얼 트윈 기술이 답을 내놓고 있다.
◇ CT 한 번에 내 심장의 디지털 쌍둥이 탄생
레빈 디렉터가 2012년 시작한 리빙 하트 프로젝트는 2년 뒤인 201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합류하면서 기술 확장의 길이 열렸다. 환자의 심장을 가상 환경에 그대로 재현하는 이 기술은 환자의 CT 촬영 데이터를 3D로 모델링하면 의사들이 그 안에서 모의 수술을 먼저 해볼 수 있게 한다.
김현진 다쏘시스템코리아 3D익스피리언스센터장은 “비행기를 만들 때 충돌 테스트를 가상에서 1000번 이상 하는 것처럼, 심장 수술도 가상에서 먼저 해볼 수 있다”며 “의사들이 환자의 심장 3D 모델 안에서 모의 수술을 하고, 가장 안전한 방법을 찾아낸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심장의 외형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심장이 뛰는 방식, 혈류의 흐름, 판막의 움직임까지 모두 시뮬레이션된다. 우심방과 좌심실을 떼어보고, 단면을 자르고,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다. 카데바(시신) 없이도 해부학 실습이 가능한 이유다.
개인 맞춤 치료도 가능하다. 같은 심장병이라도 환자마다 심장 구조가 다르므로 최적의 치료법 역시 다르다. 버추얼 트윈은 이 환자의 심장에 이 시술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전에 예측해준다.
이 기술은 FDA 승인을 거쳐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미국 보스턴 아동병원 같은 주요 병원들이 리빙하트 프로젝트를 도입했다. 심장뿐 아니라 리빙 브레인(Living Brain) 프로젝트로 확장돼 간질과 알츠하이머병 연구에도 활용되고 있다.
레빈 디렉터 본인도 이 기술로 생명을 구했다. 5개월 전 그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종양이 뇌 안팎으로 퍼져 있어 개두술(두개골 절개)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레빈 디렉터는 “매우 큰 종양이 두개골 내부에서 뇌의 섬세한 부분을 보호하는 구조를 뚫고 나온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버추얼 휴먼 모델링 기술 덕분에 상황이 바뀌었다. 의료진은 가상 환경에서 그의 뇌 모델을 만들고, 수술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장 안전한 접근법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두개골 절개 없이 코를 통한 내시경으로 12시간 만에 종양을 제거할 수 있었다.
◇ 10년 후 내 심장, 약 먹으면 어떻게 될까
버추얼 트윈의 활용은 현재 상태 진단을 넘어선다. 미래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이 핵심이다.
“한 사람이 10년 뒤에는 심장이 어떻게 될 건지 예측하는 데도 쓸 수 있습니다.” 김 센터장의 설명이다. 현재의 생활 습관, 운동량, 식습관 등을 입력하면 10년 후 심장 상태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약물 복용 시뮬레이션도 가능하다. 타이레놀 한 알을 복용했을 때 내 몸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가상 환경에서 미리 볼 수 있다. 김 센터장은 “약병 옆에 부작용이 적혀 있지만 대부분 이를 읽지 않고 먹는다”며 “가상 환경 안에서 이 약이 내 몸에 어떻게 작용할지 미리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쏘시스템은 리빙하트에서 시작해 점차 인체 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레빈 디렉터는 “이제 심장뿐만 아니라 뇌, 간, 신장, 관절 등 영역으로까지 대상을 확대했다”고 밝혔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에 대한 완전한 버추얼 트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10년 뒤 어떤 건강 상태일지, 어떤 질병 위험이 있는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예방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다쏘시스템은 2023년 9월 버추얼 트윈 기반 의사 아바타 ‘엠마 트윈(Emma Twin)’을 공개했다. 가상 세계에 사는 의사다. 엠마 트윈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질병과 검사 방법 등을 공유하고 설명한다. 리빙하트 프로젝트 내 다양한 시술에 따른 심장 반응, 코닛비전(CorNeat Vision) 각막 이식술, 리빙브레인 프로젝트의 간질 및 알츠하이머병 연구 등을 다룬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다쏘시스템의 버추얼 트윈 기술은 중국 우한의 화선산(火神山) 병원 건설에 활용됐다. 음압 병동을 빠르게 지어야 하는 상황에서, 환자가 배에 누워 있을 때 오염된 공기가 어떻게 배출되는지 시뮬레이션했다. 김 센터장은 “10일 안에 완공했던 대표적인 사례”라며 “우한시에서 다쏘시스템 덕분에 잘 지을 수 있었다고 직접 감사 공문을 보냈다”고 밝혔다.
◇ 제조업 데이터 관리 노하우, 임상시험에 적용
다쏘시스템의 의료 혁신은 제품 설계를 넘어 임상시험 분야로도 확장되고 있다. 다쏘시스템 계열사인 메디데이터는 생명과학 분야 임상시험 솔루션 선도기업이다. 지난 6월 AI 기반 임상시험 설계 솔루션 ‘메디데이터 프로토콜 옵티마이제이션(Medidata Protocol Optimization)’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 솔루션은 첫 환자 등록(FPI) 이전에 환자 부담, 시험 기관의 성과, 비용 등을 예측할 수 있다.
정운성 다쏘시스템코리아 대표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제조업 분야에서 AI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무엇보다 정확하고 정교한 데이터 기반이 필수”라며 “다쏘시스템은 CAD, PDM, PLM, 버추얼 트윈 등 기술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2012년부터는 플랫폼 중심의 데이터 통합 전략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임상 데이터는 환자의 이력, 진단 정보, 약물 반응 등 모든 정보가 잘 정리돼 있고, FDA 승인 같은 외부 규제 기준을 맞추기 위해 표준화가 잘 돼 있다”며 “이런 데이터를 ‘AI가 활용하기에 퀄리파이(qualify)된 데이터’라고 표현한다”고 덧붙였다.
메디데이터의 AI 솔루션은 AI 기반 예측 모델링, 디지털 프로토콜, 업계 최고 수준의 통합 데이터를 활용해 임상시험 설계 및 실행 방식을 개선한다. 특히 종양학 임상시험처럼 복잡한 분야에서 프로토콜 변경 횟수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댄 브라가 메디데이터 스터디 익스피리언스 부문 수석 부사장은 “종양학 임상시험은 임상연구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분야 중 하나로, 다른 치료 영역에 비해 연구 도중 변경사항이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며 “임상시험에서 과학적 목표와 실제 운영 간의 균형을 통해 치료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시장에 출시할 방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빈 디렉터는 “환자는 이 기술을 통해 본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이해할 수 있고 가능한 치료 옵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며 “버추얼휴먼 모델링 기술이 환자들에게 이해할 권리와 예측 가능한 치료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