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역 산업 DNA를 살리는 지역 특화 AI 전략
동남권은 한때 대한민국 제2의 경제권역으로 국가 제조업의 핵심 역할을 했지만, 산업 지형 변화와 인구 유출이 겹치면서 도시 경쟁력이 빠르게 약화하고 있다. 청년층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이동하고, 기업 본사는 앞다투어 서울로 이전하면서 동남권은 산업적 정체성을 다시 세워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이러한 상황은 충청권, 호남권, 강원·제주 권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 소멸과 초저출산이라는 구조적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면, 각 지역 산업이 스스로 살아날 수 있도록 돕는 인공지능(AI) 기반 혁신 전략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1970~1980년대 중앙정부는 특정 산업군을 지정해 지역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산업 정책을 설계해 왔다. 그러나 산업은 지역의 역사, 기업 생태, 노동 구조, 공급망의 결을 따라 성장한다. 같은 산업이라도 도시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국가 AI 전략이 실효성을 갖추려면, 이제는 바로 이 지역 고유의 결을 정확히 읽어내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조선 산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흔히 조선업이라 하면 대형 조선소 중심의 생태계를 떠올리지만, 울산과 거제를 제외하면 부산의 구조는 전혀 다르다. 부산의 조선업은 조선기자재 중소·중견기업이 중심을 이루며, 설계와 용접, 도장과 가공, 인증 대응 같은 세밀한 공정이 서로 얽혀 돌아가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산형 조선 AI 전략은 선박 전체를 자동화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아니라, 기자재 설계 자동화, 공정 품질 검사, 납기 예측, 국제 인증 문서 자동화 등 현장의 실제 필요를 풀어주는 버티컬 AI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의료 분야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부산은 이미 중입자·양성자 치료센터 등 고급 의료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빠른 고령화가 진행되는 도시다. 그렇기에 전국 어디나 적용 가능한 일반 의료 AI가 아니라, 에이징테크 기반 의료 AI, 즉 고령층 돌봄, 만성질환 관리, 낙상 예측, 인지 저하 조기 탐지와 같은 분야에서 경쟁력이 발휘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의료 서비스 향상을 넘어 부산 고유의 의료 산업 차별성을 만들 수 있다.
해양 산업 역시 부산이 특화 AI 전략을 추진할 최적의 분야다. 부산항은 북미 항로 연결성이 세계 2위 수준이며, 조선업 기반도 동남권 전역과 맞닿아 있다. 해양 물류 최적화, 재난 예측, 스마트 항로 탐색 같은 해양 AI 기술은 부산과 같은 조건을 갖춘 도시에서만 실증하기 쉽다. 여기에 부산대 장영실 AI융합연구원, AI융합대학원, UNIST AI대학원 등 지역 연구 생태계가 확대되며, 지역 인재가 수도권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에 정착하도록 하는 산업적 착륙 지점의 필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다.
결국 지금 지역에 필요한 것은 중앙정부가 지정하는 일괄적 산업군 배정이 아니라, 각 지역의 고유한 산업 강점을 기반으로 AI 전략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인구나 국토 규모가 크지 않은 북유럽·서유럽의 강소국들도 각국의 특화 분야에 맞춰 글로벌 제약기업을 육성해 왔다. 이들은 국가적 강점 위에 연구 인프라와 인재 양성 체계를 결합해 선택과 집중을 실천했고, 특정 제약사는 특정 질병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모델을 지역 주도형 AI 전략의 기준으로 삼아, 지역 지자체와 대학이 함께 지역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특화 AI 융합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AI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만, 모든 도시가 같은 방식으로 성공하는 기술은 아니다. 각 지역이 스스로의 산업적 결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 위에 특화 AI를 심을 때, 비로소 지역의 미래산업과 신성장 생태계, 인재 양성, AI 인프라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지역 소멸 위기를 넘어 새로운 성장 경로를 열어가는 길이다.
송길태 교수는 부산대 정보컴퓨터공학부 교수로 올해 11월 출범한 부산대 장영실 AI융합연구원 초대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대 인공지능융합혁신대학원 책임교수로 지역 특화 AI 융합 인력양성과 정밀의료·신약개발 및 제조·해양물류 특화된 AI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2011년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 스탠포드대에서 4년간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