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부터 EU 수출 ‘디지털 여권’ 필수… 한국 제조업 준비는?

배터리·자동차 부품, 탄소 배출 이력 제출 의무화 데이터 주권 지키며 협업하는 ‘카테나 엑스’ 부상 다쏘시스템-마이셀, 국내 첫 DPP 유럽 연계

2025-11-12     김동원 기자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LCA·DPP 활용 전략 컨퍼런스’ 현장. /다쏘시스템

2027년 2월부터 한국에서 만든 배터리를 유럽으로 수출하려면 제품마다 ‘디지털 여권’을 제출해야 한다. 이 여권에는 원료 채굴부터 제조, 운송, 재활용까지 제품의 전 생애 동안 배출한 탄소량이 모두 기록된다. 이른바 ‘DPP(디지털 제품 여권) 제도’다. 배터리 산업에 의무 적용되는 이 제도는 단순한 환경 규제가 아니다. 유럽연합(EU) 시장 진입을 위한 새로운 관문이자, 글로벌 공급망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경쟁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10월 말, 다쏘시스템은 바이오소재 스타트업 마이셀과 함께 국내 최초로 DPP를 유럽의 공식 데이터 네트워크인 코피니티엑스(Cofinity-X)와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같은 달 29일 부산에서는 다쏘시스템코리아, SK AX, IBCT, 코피니티엑스 등 4개 기업이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한 LCA·DPP 활용 전략 컨퍼런스’를 열고, 한국 제조업의 대응 전략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 탄소 배출량, ‘숫자’로 증명하라

DPP를 이해하려면 먼저 LCA(전과정평가·Life Cycle Assessment)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LCA는 제품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폐기될 때까지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을 수치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일례로 전기차 배터리 하나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리튬과 코발트 같은 원료를 채굴하고, 이를 배로 운송하고, 공장에서 가공하고, 완제품을 조립한 뒤 유럽까지 배송하 고, 수명이 다하면 재활용하는 전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모두 합산하는 것이 바로 LCA다.

이렇게 계산된 탄소 배출량을 PCF(제품 탄소발자국·Product Carbon Footprin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PCF 데이터를 QR코드 형태로 제품에 부착한 것이 DPP다. 소비자가 QR코드를 스캔하면 “이 배터리는 생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500kg 배출했습니다”라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홍석진 트레스웍스 대표는 이번 컨퍼런스에서 LCA를 “탄소 책임의 새로운 언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제 탄소 책임은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소비하는가’에 따라 나뉜다”며 “유럽은 자국에서 소비되는 제품의 탄소 배출 전체를 관리하겠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EU는 2024년 7월 13일 DPP 제도를 공식 발효했고, 2027년 2월 18일부터 배터리 산업에 의무 적용한다. 2025년부터는 자동차 부품 공급망에서 PCF 데이터 제출이 요구된다. DPP 없이는 EU 수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시대가 곧 온다는 뜻이다.

◇ 데이터를 지키면서 협업하는 ‘새로운 규칙’

DPP가 단순히 “탄소 배출량 보고서를 제출하세요”로 끝나면 간단하겠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완성품 제조사는 수백, 수천 개의 부품 납품사로부터 각각의 탄소 데이터를 받아 하나의 QR코드로 통합해야 한다.

문제는 기업들이 자사의 생산 데이터를 외부에 공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가 정보, 공정 기술, 거래처 관계 등 민감한 정보가 모두 데이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유럽이 내놓은 해법이 바로 ‘데이터 스페이스(Data Space)’ 개념이다.

윤항노 SK AX ESG 파트장은 “데이터 스페이스는 각 기업이 데이터를 직접 보유한 채, 필요한 순간에만 계약 기반으로 특정 데이터를 교환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미국이나 중국의 클라우드처럼 데이터를 중앙 서버에 모두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기업들이 자신의 서버에 데이터를 보관하면서도 필요할 때 안전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를 흔히 ‘데이터 주권’ 전략이라고 부른다.

유럽 자동차 산업에서 이미 가동 중인 대표적 데이터 스페이스가 ‘카테나 엑스(Catena-X)’다. BASF, 보쉬, 지멘스, SAP 등 유럽 주요 기업들이 참여하는 이 플랫폼은 코피니티 엑스라는 조직이 운영하며, 2025년부터 PCF 데이터 제출을, 2027년부터 DPP 의무 적용을 본격화한다.

다쏘시스템은 바이오소재 스타트업 마이셀과 함께 국내 최초로 DPP를 유럽의 공식 데이터 네트워크인 코피니티X(Cofinity-X)와 연계하는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왼쪽부터) 이정륜 IBCT 대표, 김민혁 SK AX 제조/Global사업 부문장, 정운성 다쏘시스템코리아 대표이사, 토마스 뢴쉬 코피니티X 대표. /다쏘시스템

한국에서도 대응 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다쏘시스템코리아는 3D익스피리언스 플랫폼으로 설계·생산 단계부터 탄소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고, SK AX는 카테나 엑스 연결 컨설팅을, IBCT는 ‘인피리움(Infirium)’이라는 국산 플랫폼으로 데이터 교환 인프라를 제공한다. 지난 10월 마이셀과 다쏘시스템의 계약은 한국 기업이 유럽 DPP 네트워크에 공식 연결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 “중소기업이 뒤처지면 공급망 전체가 무너진다”

이번 컨퍼런스가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열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산·울산·경남 지역에는 자동차 부품과 배터리 소재를 생산하는 중소·중견기업이 밀집해 있다. 대기업은 자체 역량으로 DPP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지만,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중견기업은 상황이 다르다.

김현 다쏘시스템코리아 파트너는 “대기업 중심의 공급망 구조 속에서 데이터 접근이 어려운 중소기업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현장에서 행사를 열었다”며 “중소기업이 DPP를 준비하지 못하면 공급망에서 배제되고, 결국 완성품 기업도 EU 수출이 막힌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은 높은 제조 역량에도 불구하고 산업 전반의 디지털화는 아직 부족하다”며 “한국 기업이 스스로 데이터를 만들고, 관리하고, 교환하는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 다쏘시스템코리아 파트너는 “한국 기업이 스스로 데이터를 만들고, 관리하고, 교환하는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쏘시스템

이정륜 IBCT 대표는 “탄소 데이터는 이제 보고서가 아니라 공급망을 통과하는 입장권이자 영업 자산”이라며 “국내 기업이 데이터 주권을 지키며 글로벌 기업과 협업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온프레미스(내부 서버) 기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운성 다쏘시스템코리아 대표이사는 “이번 계약은 한국 기업들이 LCA와 DPP를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닌 전략적 경쟁력의 도구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